본래 고구려의 혈산현(穴山縣)인데 신라때 동산현(洞山縣)으로 고쳐서 명주(溟州)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가 1018년(고려 현종9)에 익령현(翼嶺縣)에 속해 내려오다가 조선조때 현남면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21개리를 관할하다가 1945년 3.8분단선으로 인하여 강릉군에 붙어있었는데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양양군에 환원되었다.
현남면은 동산현의 옛땅이니 동산 남쪽에 위치하였으므로 현남이라 명칭되고 소재지는 인구로 농어업이 대략 반반이며 인구밀도가 높다 천년전의 縣治를 하던 곳이요 幾十回의 兵火가 거쳐간 땅이며 竹島의 鍊砂台, 弄鳩岩 등은 신선이 노닐던 幻影이 아롱거리고 梅湖에 배띄우니 鶴과 거북이가 함께 逍遙하느니라 和尙岩 옛 전설은 崔公의 逸話로 懷舊之情에 陶醉케 하도다.
인구리는 海松亭으로 인 없다가 仁邱驛(과거는 원포리 麟邱谷으로부터 移驛하여 왔다함)이 설치된 후 仁邱라 칭하였으며 그후 民家의 增加로 말미암아 一, 二里로 分割하였다.
고려말기에 향교 소재지로서 後山에 죽림이 울창하여 秋節에 사람이 대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감을 따먹을 정도로 대나무가 굵었다고 하며 그후 竹里라고 부른다고 한다.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죽리(일명 댓골)와 정자리(정자골)를 병합하여 이름지었다.
과거 큰바다라고 불러왔는데 그 후 廣津里라고 부르고 속칭 "광나루"라고도 칭한다.
망월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세가 梅花가지모양으로 형성되어 開梅라 하다가 그후 지금과 같이 개(浦)가 이루어졌으므로 浦字를 따서 浦梅라고 부른다고 한다.
현재 거주하는 趙氏先祖 某人의 대과급제 당시 부처님이 현몽되어 登科하였다는 전설로 견불리라 칭한다. 지형이 "노승예불"의 형국이라하여 견불이 변하여 존불이라하며 또는 개매위쪽이 되므로 웃개매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견불리라 하였다.
浦梅의 梅花가 結實하여 南涯地域으로 向하여 떨어지는 모양이기 때문에 落梅라고 불러오다가 그후에 남쪽바다라는 뜻으로 南涯라고 개칭하였고 자연인구증가로 1,2,3,4리로 분할하였다.
과거 임호정리에 속하여 있었고 멀리 바라다 보이는 마을이므로 머지개라 하였고 최초에는 인구곡(麟邱谷) 仁邱驛의 소재지였다고 한다.
과거에는 임호정리에 속하였고 그 당시 주위가 防築이었고 강릉과 양양의 郡界였기에 지경리라고 한다.
임호평야가 과거에는 호수로서 이름이 臨湖라고 하며 당시 부근에 정자가 있었기에 臨湖亭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지금도 地中에서 말??나오고 있다.
동리 남쪽산에 岩石이 있는데 그 암석의 모양이 갓과 같다하여 冠岩이라 하였고 맞은편 산밑에 족두리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두가지 이름을 합하여 갓바위라하여 笠岩里라고 칭한다.
망월산 走龍이 月川에 머물러 반달型을 이루고 花洞(꽃골) 寺洞(절골) 於穴洞(느르리골)의 세골형세가 내천자를 이루었으므로 일명 "달내"라고 하고 한자로 月川이라고 쓰며 上月川, 下月川으로 구분한다. 일명 웃 달내라고도 한다.
본래 월천리(속칭-달래)였으나 마을이 산골짝을 따라 길게 형성되고 戶증가로 서쪽지역은 上月川 동남쪽 지역은 下月川으로 구분하였다.
斗里는 북분리에 속해 있었고 한때는 後洞으로 되었다가 그 지형이 말(斗)처럼 되었다고 하여 두리라 칭한다함. 昌里는(과거는 倉里라고도 함) 竹里에 속하였다가 倉察使의 畓住地라 하여 昌里라고 한다. 市里는 倉里附近에 시장이 있던 곳이라 하여 시변리라 불렀다고 하며 주민의 인구수가 적어 3개리를 합하여 두창시변리라고 부른다.
본래 고구려때 혈산현(穴山縣)의 소재지인데 신라때 동산현(洞山縣)으로 고쳐서 내려오다가 조선조 때 동산리(洞山里)가 되어 양양군 현남면에 편입되었다.
옛 예맥 당시 北方邊境이라 하였다가 그 後 地形이 盆地 모양으로 형성되었다하여 北盆里(뒷벌)라 칭하였다. 또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거릿말, 골말, 구렁말 성촌(城村) 영남동 용숫골 현촌(峴村)을 병합하여 북분리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