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소재지에 서부임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地勢는 산악이 전면적의 9害以上을 占하고 있으며 水多谷深하여 백성의 생활은 극히 貧困한 위에 과거 병자년 홍수를 당하여 인명손실과 田土流失이 桑海의 慘禍를 보았다.
그러나 지하자원만은 無盡藏의 寶庫로서 磁鐵의 매장량이 限없고 倭政時부터 지금까지 國財를 傾注하고 있는 터이다.
인구의 밀도는 稀薄하나 장수고령자가 많음을 볼 때 산수의 瑞氣가 아닌가하는 感도 있다.
一樹에 五色花가 피어서 연유되었다는 오색약수는 변함이 없고 오색령일대의 四時節의 佳境은 가히남금강이라 칭할 수 있고 99곡의 구룡령은 홍천과의 중요통로가 된다. 1945년 해방후 38以南에 위치한 오개부락(서림리, 갈천리, 황이리, 명지동, 조개리)은 강릉군 신서면에 속하였다가 1954년 11월 행정이양과 함께 본군에 편입되었다. 그후 1973년 7월 조개리는 홍천군 내면에 편입됨.
일제시대에는 상평리였었는데 행정수복후에 수상리로 분리된 부락이다. 병자년 대홍수전에 상평국민학교 앞으로 하천물이 흘러 벼랑에 부딪혀 위로 돌아 흘러내려갔다. 현재 서면 소재지로서 강줄기가 변경되어 마을이 형성되었으므로 "물웃구미"(수상)라 한다.
옛부터 "웃드루"라고 불리우는 평지가 있었는데서 명명되었다.
얼료골(元龍골) 임천리와 수상리와의 경계에서 상리 뒷산 능선으로해서 오색령으로 가는 큰길이 있는데 진등을 이어 마을이 되었다고 하여 장승리라 명명하였다.
고대풍수설에 의하면 溪谷이 심오하고 연하(烟霞)가 淡淸하여 風이 不倒僑中仙으로서 西方에 위치하였다하여 西仙里라고 한다. 또한 성황당 고개 밑에 있어서 신선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명명하였다고도 한다.
노내골(論化里) 옛날 양양관가에 상소차 주민들이 모여서 최종 논의하고 결의하던 곳으로 정하였다는 연유로 명명하였다 한다. 또한 산과 논이 많다하여 "논옛골" "노내골"이라고도 한다.
본래 명칭은 加羅木이 많으므로 가라피리라고 하였으나 행정수복후에 오색1리로 편입되었다. 옛날 주민들은 갈대와 가라목피로서 짚신, 삿갓, 갈자리 등을 만드는 수공업으로 생업을 삼았었다.
오색석사는 계곡의 오색암석에 연유된 명칭이라고도 하나 한편 한나무에 5색꽃이 피었다하여 명명한 지명으로 1937년 양양군수로 부임한 전재우 군수는 오색리에서 3색 꽃이 피는 나무를 파서 이식하였으나 꽃이 피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8.15광복 후까지 3색꽃이 피던 고목이 관터 입구 근방 도로변에 있다가 노목으로 썩어 없어졌다. 본래 현 오색2리 지역만을 오색리로 불러오다가 행정수복후 가라피리가 오색1리로 편입되면서 오색1리로 명칭하였다.
川岸上에 형성된 부락임을 表徵한 것이다. 뒤에 언덕이 있고 앞에 큰 내가 흐르므로 범부리라 명명하였다.
음지에 處한 마음임을 표징한 것이며 200여년전에 槐木이 많아 槐木亭이라 하였으며 그후에는 態田(곰밭)이라 하였다가 북평리로 개칭하였다. 속칭 북들, 북드루, 아랫드루라고도 한다.
마을 앞 井水에서 용이 登天하였다는 전설에 의하여 龍泉이라고 한다.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뒷골 버덩말 웃곰밭을 병합하여 마을앞에 있는 용소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
양양읍 임천리 앞강을 건너 북평, 용천을 거처 물골따라 돌다리를 네곳이나 건너서 마을에 간다고 하여 물골마을 또는 속칭 수동이라고도 한다.
동리 중간에 산이 있어서 內峴이라하여 속칭 "안고개"라고도 칭하고 있으며 마을 중간에 밥상과 같은 岩石이 있어 소반암동이라는 小洞이 있다.
마을 앞 계천에 송어, 연어, 자라가 많았으므로 명칭하였다. 옛날에는 마을 맑側수십호 되었으나 점차 줄어서 행정구역 개편시 1954년 송천리에 편입되었다. 일명 "송어골"이라고도 한다.
黃耳里 선림원에서 북방에 위치한 암자가 있었다하여 북암리라고 하는데 속칭 "북애미"라고도 하며 1960년대까지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몇집만 살고 있다. 마씨 세거지였다.
윗 용소골 하천에 큰 소가 있는데 이 소에서 용이 등천하였다하여 용소리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독립마을이 있었던 것이 ?린?점차로 줄면서 공수전리로 편입되었다. 속칭 "용수골"이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마을 주민들은 洞里가 牛形局이라하여 潤産의 덕이 充滿하리라는 연유에서 리명을 붙인 것이다.
하천 가운데 松林이 울창하여 강물이 양쪽으로 흘러내려갔다하여 松川이라 하였다. 또한 뒷내의 지류인 속내가 있으므로 속내라 칭하다가 변하여 송애, 소래 또는 송천이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송천리라 하였으며 1954년 송어리(松魚里)를 병합하였다.
마을의 명칭은 조선조때 관청의 경비에 쓰기 위하여 관가에서 정해놓고 경작하던 공수전(公須田)이 있었던 연유로 유래되었다. 또한 200여년전 어느 지관이 이르기를 마을의 형국이 귀인공자처럼 생겼다하여 마을명칭이 꼭 알맞다고 전하고 있다.
서면 서쪽에 있는 마을로 삼림이 울창하여 西林里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또한 서림사(西林寺)가 있었던 연유로 서림골 또는 서림이라 하다가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림리라 하였다고 한다.
토질이 척박하여 흉년이 들면 곡식이 황이 들어 누런 귀처럼 오그라져 흉년이 자주 든다고 하여 황이리라 명칭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농촌경제가 향상되지 못하였을 때 화전민의 생활이란 극히 궁한면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춘궁기에는 葛根으로 근근이 糊하여 오는 실정에서 前川이 葛粉一色이었다고 하는데서 갈천 또는 속칭 "치래"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