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강현면의 유래

본래 양양의 지역으로서 강선정의 이름을 따서 降仙面이라하여 상복, 중복, 하복, 강선, 宅村, 물치, 間村, 둔전, 석교, 침교, 鍊光丁, 회룡 등의 12개리를 관할하다가 1916년 군면의 폐합에 따라 沙峴面의 금풍, 사근교, 물갑, 積銀淵, 방축, 畓洞, 광석, 정암, 場坪, 용호, 장산, 전진, 주청의 13개리와 道門面의 도문리 일부를 편입하여 降仙과 沙峴의 이름 한자씩 따서 강현면이라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으로 沕淄里 남으로 前津一里(酒聽거리)까지의 구역을 劃定하여 서로 설악산정에 이르기 까지 24개리로 구성되었는데 본면은 관동팔경의 首位인 낙산사를 비롯하여 설악산 승지가 있고 서울과의 항공로가 개설됨에 비행장이 설치되고 5.16후부터 동해안 방축사령부가 주둔하는 등 관광, 산업, 군사의 요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으며 장산평과 대조평의 평야는 동해안유수의 곡창으로 생산물이 많이 産出된다.

물치리(沕淄里)

물치천의 상류계곡에 산재해 있는 매장된 철광석과 노천광석으로 인하여 철성분이 다량 합류되어 흐르면서 항상 검은물이 흘러 이곳에 자연히 깊은 물치소가 만들어진 연유로 물치리라 명명하고 兪勿齊 선생과 崔笠 선생의 주거지가 있었던 연유로 택말이라고 하는데 우암 송시열의 물치주 詩句로도 유명하다. 1916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宅村을 병합하여 물치리라 명칭하고 있다.

강선리(降仙里)

新羅時代 仙人永郞逑郞이 이곳에서 잠시 逗留하였으므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降仙台를 築하고 이로 인하여 里名을 강선리라고 하였다.

하복리(下福里)

김해 金씨의 근거지로서 子孫萬代에 福이 "復"하다는 自矜心의 所産인듯하나 실은 本面中에서 농산물이 풍성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인구가 조밀하여 지금은 上中下 3리로 구분되었다. 옛날에는 福泉이 있고 앞 松亭에 활을 쏘던 觀德亭이 있었다고 한다.

중복리(中福里)

중복의 서남쪽 앞 山 넘어골에 복골 김해 金씨 洙字行列 19代祖父가 원주에서 독신으로와서 사망하여 현재 政丞골이 百代千孫之地라는 명당에 묘를 썼는데 당시 풍수지리에 유명한 지관이 현재 위치보다 한金井을 더 올라가 묘를 쓰면 政丞判書가 나고 현위치는 자손이 번창한다고 전하고 있어 양양8명당의 하나이며 그후 김해金씨 자손은 많이 번창하였다.

상복리(上福里)

본래 양양군 강선면의 지역으로서 복골 위쪽이 되므로 "상복골"또는 "상복동"이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복리라 하여 강현면에 편입되었다.

회룡리(回龍里)

里의 周圍山勢가 臥龍이 俯伏한것과 흡사함으로 회룡리라 칭하였다 본래 양양군 강선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도룡뇽과 같이 되었으므로 도룡골이라 불러오다가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희룡리라 하여 강현면에 편입되었다.

장산리(長山里)

本里後鹿이 長山이므로 이를 表徵한 것이다. 속칭 진뫼 (긴뫼 長山)를 진미로 칭하기도 한다.

석교리(石橋里)

300년 전부터 大門基라 칭하다가 李朝末葉 行政區域 定界時 노고천에 큰 돌다리에 연유하여 석교리로 개칭하였다.

간곡리(間谷里)

석교리와 둔전리 중간에 위치하였으므로 간곡촌이라고 하다가 간곡리로 개칭하였다. 또 새잇말 사이 대문터라고도 한다.

물갑리(勿甲里)

마을 가운데 里中山形이 한자의 "勿" 자와 같으므로 물갑리라고 칭한다. 본래 양양군 사현면의 지역으로서 갈모봉 밑이되므로 물갑이라 부르다가 1916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물갑리라하여 강현면에 편입됨.

사교리(沙橋里)

300여년전 색은교(색은다리, 싹은다리)라고 하다가 그후 沙介橋里라 개칭하였으며 일제시에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사교리로 개칭하였다.

금풍리(金風里)

300여년전에 "소풀무골" 熔鐵冶이라 칭하다가 李朝末葉 행정구역 개편으로 금풍리라 명명하였으며 속칭 "쇠풍골"이라고도 한다.

침교리(砧橋里)

300여년전 放鶴亭里라 칭하던 바 그후 교량의 가설이 不充分한 韓末時代에 부폐된 足침木으로 다듬이돌 같은 석재로 臨時架設 하였던 유래로 명명하였으며 또한 마을 한가운데 약 5백년된 고송이 마치 "방아다리"처럼 생긴 상징적인 뜻으로 속칭 "방아다리"로 칭하고 있다.

적은리(積銀里)

300여년전에 小洞이라고 칭해오다가 基後漢字音을 따서 적은리라고 개칭하였다.

광석리(廣石里)

洞口앞에 10여名이 앉을수 있는 광석이 있으므로 광석리라고 하는데 지금은 광석은 없어지고 한, 두사람이 앉을 만한 작은돌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속칭 "넓은돌이"또는 "나분돌이"라고도 한다.

답리(畓里)

田作만을 農家의 首位로 하던 시대에 마을앞들의 비옥한 토질, 좋은 토질을 이용하여 新羅때부터 落山寺의 佛尊畓으로 개칭하여 開沓史上의 嚆矢였음으로 洞名이 지어진 것이다.

전진1리(前津1里)

오봉산 낙산사를 중심으로 하여 남쪽마을을 앞나루라 칭하고 북쪽 마을을 뒷나루로 불러오던 바 行政區域 變更으로 전진 一,二里로 수분되었다.

전진2리(前津2里)

오봉산 낙산사를 중심으로 하여 남쪽마을을 앞나루라 칭하고 북쪽 마을을 뒷나루로 불러오던 바 行政區域 變更으로 전진 一,二里로 수분되었다.

주청리(酒廳里)

옛날에 술을 만들어 팔든 주청이 있었던 곳으로 주청리라고 한다.

용호리(龍湖里)

용호리앞에 용개가 있었으므로 용호리라고 칭한다. 본래 양양군 사현면의 지역으로서 용못 뒤쪽에 있으므로 뒷골, 또는 용못이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호리로 고쳐져 강현면에 편입되었다.

정암1리(釘岩1里)

1466년 낙산사 중수 때 낙산사 홍예문의 성문과 축성 석재로 제재할석하여 이용하였으므로 지금도 징을 박았던 자리가 완연하다. 7번 국도변 서쪽밭에 자리하였는데 이에 연유되어 "정암리"라 명명하였으며 지금은 1,2리로 분할되어 있는데 속칭 "증바우"라고도 칭한다.

정암2리(釘岩2里)

1466년 낙산사 중수 때 낙산사 홍예문의 성문과 축성 석재로 제재할석하여 이용하였으므로 지금도 징을 박았던 자리가 완연하다. 7번 국도변 서쪽밭에 자리하였는데 이에 연유되어 "정암리"라 명명하였으며 지금은 1,2리로 분할되어 있는데 속칭 "증바우"라고도 칭한다.

방축리(防築里)

300여년전에는 登盤洞으로 불렀었고 其後堤洞으로 다시 고쳐 부르다가 방축이 있으므로 방축리로 개칭되었음.

둔전리(屯田里)

新羅時代에 창건한 陳田寺가 있었는데 고려때 屯田이 있었으므로 둔전리라 칭하게 되었다. 조선조때 강선면으로 있을 때에는 강선역의 토지인 둔전이 있었으므로 둔전동이라 불러오다가 1916년 행적구역 폐합에 따라 둔전리라하여 강현면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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